커피 때문에 생긴 일 · 03 · 이야기와 만화
우리 회사 커피 맛이 달라졌다. 설정을 아는 사람이 퇴사했다
거래처 인수인계는 열두 쪽. 커피머신 인수인계는 영 쪽이었다.
그 사람이 남긴 인수인계 문서는 열두 쪽이었다. 거래처 연락처와 서류가 있는 위치, 결재를 올릴 때 주의할 점까지 적혀 있었다. 펭귄은 잘 정리된 문서를 보며 당분간 큰 문제는 없겠다고 생각했다. 커피머신은 그 문서에 없었다.
금요일 마지막 인사를 할 때도 누군가 커피는 이제 누가 챙기느냐며 웃었다. 다들 농담으로 받았다. 그 질문이 월요일 아침의 정식 안건이 될 줄은 몰랐다.

퇴사한 동료가 남긴 것
펭귄원두는 그대로인데 왜 맛이 달라졌지?
하양이설정하시던 분… 지난주에 퇴사했잖아.

하양이그분 이 버튼 누르지 않았어?
펭귄오른쪽 아니었나?
선배그건 뜨거운 물 버튼 같은데. 설명서부터 보자.
원두 봉투는 지난주와 같았다. 새 원두로 바꾼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 각자 컵을 들고 온 사람들이 한 모금씩 마신 뒤 머신 앞으로 다시 돌아왔다. 평소에는 누를 줄 알았던 버튼이 갑자기 낯설어졌다.
하양이는 오른쪽 버튼이라고 했고, 펭귄은 그 옆을 기억했다. 선배는 아무 버튼이나 더 누르기 전에 설명서를 펴자고 했다. 화면에는 사용자별 메뉴가 남아 있었지만, 그중 어느 것이 모두가 마시던 커피인지는 적혀 있지 않았다.
공유 폴더에서 커피를 검색하자 회식비 영수증과 카페 미팅 자료가 나왔다. 주문 내역은 있었고, 매일 어떻게 마셨는지는 없었다. 회사는 커피를 샀다는 기록은 잘 남겼지만 커피를 마시는 방법은 한 사람의 기억에 맡겨두고 있었다.

펭귄공유 폴더에 커피를 검색했는데…
하양이회식비 영수증만 나왔어?

결국 퇴사한 동료에게 연락했다
펭귄혹시 어떤 메뉴 누르셨는지 기억하세요?
동료 메시지사용자 1이요. 큰 컵으로 저장해둔 거.
퇴사한 동료에게 안부를 묻는 메시지를 쓰다가 펭귄의 손이 멈췄다. 본론이 커피머신의 버튼이라는 사실이 조금 민망했다. 그래도 물어보는 편이 서로 다른 버튼을 하루 종일 추측하는 것보다 나았다.
답은 예상보다 짧았다. 사용자 1, 큰 컵으로 저장해둔 메뉴. 대단한 비밀 설정이 아니라 이름을 바꾸지 않은 채 쓰던 생활의 습관이었다. 익숙했던 사람에게는 설명이 필요 없었고,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그 이름만으로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세 사람은 현재 메뉴와 평소 쓰는 컵을 함께 살폈다. 무엇을 바꿨는지도 모른 채 설정을 계속 덮어쓰기보다, 다시 찾을 수 있는 기준을 하나 남기기로 했다.

하양이회사 기본이라고 이름을 바꾸면 되잖아.
선배컵과 설정도 같이 적어두자. 다음 사람은 맞히기 게임 안 하게.

동료 메시지아, 정수기 잠금 푸는 법은 아세요?
펭귄인수인계… 한 줄만 더 부탁드려요.
공용으로 쓸 메뉴에는 알아볼 수 있는 이름을 붙이고, 설명서를 어디에 뒀는지도 적었다. 잘 아는 사람 한 명을 새로 정하는 대신, 다음 사람이 혼자서도 찾을 수 있도록 해두는 일이었다.
그날 오후에는 누구도 머신 앞에서 오래 서 있지 않았다. 커피가 원래대로 돌아와서인지, 무엇을 눌러야 하는지 알게 돼서인지 탕비실의 질문이 줄었다.
퇴사한 동료의 마지막 메시지가 도착한 것은 그때였다. 정수기 잠금 푸는 법은 아느냐는 질문이었다. 펭귄은 열두 쪽짜리 파일을 다시 열었다. 아주 작은 항목 하나를 더 넣을 자리는 있었다.
커피를 사고 마시고 나누는 일상에서 출발한 창작 만화입니다. 실제 회사·직원·고객의 사례나 발언을 재현하지 않았습니다. 그림은 승인된 펭귄·하양이·선배 캐릭터를 바탕으로 AI로 제작했습니다.
퍼스트펭귄커피컴퍼니 · 당신의 커피를 로스팅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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